가게의 얼굴, 간판의 역사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8기 김규리 기자

kyu0814ri@navercom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외국 문자로 표기된 간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일본식 술집, 이국적 분위기의 식당 등이 유행하면서 현지의 언어로 간판을 표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글문화연대가 서울과 경기, 부산 등 도심 13곳의 간판 39566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글과 로마자·한자 등 외국 문자를 함께 적은 간판이 35%, 14035개나 됐다고 한다. 간판 3개 중 1개는 순 한글 간판이 아닌 셈이다. 한글로만 된 간판은 46%, 18229개로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이렇게 우리나라 간판에 외국어가 침투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 이후 한자, 세계화를 맞이하여 영어로 표기된 간판까지 한국의 길거리는 시대별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해왔다. 간판의 역사를 알아보며 한국 옥외 간판에 어떤 문자가 사용되었는지, 정부의 방침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시대별로 알아보자.

 

 

일제 강점기, 일본어 간판이 거리를 뒤덮다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종류의 간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일본인 상점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간판(看板)’이라는 이름이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듯, 일제강점기에는 간판 문화를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여건을 만들 수 없어 일본 간판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광복 이후, 한글 간판을 늘리기 위한 정부의 노력

 

광복 이후 한국에서는 한국에 맞는 간판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행정력을 갖추고 비로소 간판 문자 사용에 관한 행정적 조치들이 나타났다. 특히 한국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사용하지 못했기에 광복 이후 상대적으로 국어와 국문을 중요시하여 다른 언어나 문자를 일상생활에서 섞어 사용하는 데 비판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찰력까지 동원하여 한자 간판을 한글 간판으로 거의 강제로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강제적인 간판 교체 작업은 상인들에게 영업상의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데도 아무런 법령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행정상으로 비판할 점이 많았으나 이 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이때부터 길거리에 한글 간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968년, 한국에 왔던 미군들이 촬영하여 남긴 사진들을 참고해보면 정부의 강경한 조치가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영어, 한자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에서 한글 간판이 많이 정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제화와 서구 문자의 침투

 

외국과의 교류가 늘면서 간판을 한글로만 제작하도록 하는 방침에 문제가 생겼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영어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대통령이 직접 한글로만 된 간판을 영문과 함께 쓰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특히 서울시에서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일부 관광호텔, 기념품 상회 등의 간판은 반드시 병기하도록 조치했다.

 

 

한글이 없는 간판은 설치할 수 없다?

 

특정 관광 지역에서 영어를 병기한 것과는 별개로, 1970년대부터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서구 문자를 사용하는 간판이 늘었다. 이에 따라 1973년경에 시행규칙으로 간판에 반드시 한글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관련 규정이 마련되었다. 197811월에는 해당 법규에 따라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간판 단속을 벌였다. 이는 일반 업소를 대상으로 하여 한글을 사용하지 않고 외국어만으로 간판을 달았던 19개의 업소를 즉심에 회부하기까지 했던 최초의 사건이다. 규정은 1991년에는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의 시행령에 포함되면서 법적 위상이 높아졌다.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시행령의 규정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므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국에서는 한글이 없는 간판을 설치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조항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옥외 간판에 외국 문자 표기가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항에 특별한 사유의 범위와 이를 판단하는 주체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집중적인 단속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 간판에 커다랗게 외국 문자를 표기하고 옆에 작은 글씨로 한글 병기를 포함하여 단속을 피하는 등 업주 측에서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사업자의 자유 제한? 그러나...

 

결국 세계화 시대에 영어 사용을 권장했던 것만 제외하면 우리 정부는 줄곧 한글 간판을 수호하는 정책을 펼쳐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일본 가나 문자, 한자, 영어 등 외국어로 표기된 간판을 한글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때마다 상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간판을 바꾸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과 강제적으로 간판 교체를 요구하는 것은 상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책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사업자는 자신의 간판이 잘 드러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행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제작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외국 문자의 침투가 심했던 우리 간판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가 규제하지 않았을 경우 지금쯤 길거리에서 한글 간판을 보기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에서 거리의 간판에 관심을 기울였기에 그나마 한글 간판이 절반가량 보존된 것이다.

따라서 한글을 보존하기 위해서, 또 자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서 어느 정도 수준의 규제는 필요하다. 외국인 관광객의 편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국민이 간판을 읽을 때 불편함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간판의 형식은 자유롭게 하되 한글로 그 이름을 병기하도록 하는 제도가 적절한 수준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업자 등록을 마친 후 한글 표기를 지워버리는 등 단속을 피하는 상인들이 있어 철저한 관리·감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국민의 인식을 반영하지 못한 강력한 제도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선구적인 시안에서 마련된 제도가 국민들의 뒤처진 인식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 정부가 오래전부터 마련해둔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의 시행령을 철저하게 감독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한글 간판의 소중함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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