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다만 의사소통의 도구인가요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8기 이원석 기자
lemonde@khu.ac.kr


우리가 처음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아이는 무한한 호기심으로 주변 사물을 지칭하는 말부터 점차 ‘사랑’처럼 추상적인 개념까지 학습한다. 이 모든 학습 과정에는 부모가 깊이 개입한다. 아이에게 부모는 처음 접하는 언어 공동체이자 모방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아이는 부모 품에서 언어 규범을 배우며 사회를 간접 체험한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언어 학습 과정은 개인적인 정서 발달과 사회화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반면 언어 교육이 가정의 문턱을 넘는 순간 언어 교육의 정서적인 면은 생략한 채 효율적인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제도권 교육을 중심으로 효율성 향상에만 급급하다 보니 시험 점수처럼 단편적인 학습 결과만 쫓는 부작용을 낳는 것이다. 이 기조는 과거 실용정부 시절 정점을 찍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영어 공교육 완성 정책’을 내세우며 영어 과목뿐만 아니라 국사와 국어까지 영어로 가르치자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펼쳤다. 세계화 시대에 맞춰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재를 키우는 쪽이 국가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피상적인 판단에서였다.

 

사진 (엠비씨 뉴스 <이명박 후보, “영어 책임지겠다”> 20071016)

그러나 모든 교육은 각자 나름의 본질과 목적을 가진다. 우리가 국사와 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의무 교육 과정이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앞서 새겨온 민족정신을 헤아리며 잊지 않기 위함이다. 더욱이 그중 한글은 인류사에 유일하게 창제 기록이 남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발자취다. 앞서 언어 학습은 정서를 포함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은 막연하게 선진국의 언어와 정서를 동경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언어가 소통 수단을 넘어 언어 권력이 되어 은밀하게 우리 가치관 안에 자리매김한 것이다. 나아가 국사와 국어를 영어로 배운다고 한들, 효율적으로 언어 능력에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오히려 교사와 학생 모두 교육의 목적을 혼동한 채 수업의 질적 저하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사회 곳곳에 교육을 빙자한 언어 권력이 숨어있다. 수학 공식처럼 거의 모든 대학교에서 영어 과목을 이수해야 하며, 우수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도 일정 수준 이상 영어 성적을 기입해야 유리하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필수로 영어를 교양처럼 학습해야 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이제는 각자 필요 직군과 역할에 따라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영어 중심의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부터 변해야 한다.

미국에 처음으로 토익(TOEIC) 시험 개발을 의뢰한 게 일본 재계 단체이며, 세계에서 해당 시험을 가장 많이 치르는 나라가 한국인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 교육평가의원회(ETS)가 밝힌 국가별 응시생 수에서 2013년 기준 한국은 207만 명으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2013년을 마지막으로 응시생 수를 공개하지 않았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 후 그들을 굴복시킨 미국의 강력함에 매료됐다. 곧 일본은 특유의 모방 정신으로 미국의 선진 문화와 사상 그리고 언어까지 흡수하려 노력했다. 한국 역시 비슷한 환경에서 일본의 경제 부흥을 지켜보며 자연스레 일본을 따라 미국과 그들의 언어인 영어마저 선망하게 된 것이다. 

다시금 언어를 교육하는 근본 목적을 떠올려보자. 국제 공용어로써 영어가 가지는 위치와 유용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유용함과 별개로 영어를 배우는 동기와 학습 과정은 각자 달라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영어를 반사적으로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경향이 짙다. 영어 학습을 강요하는 건 장기적으로 효율적인 의사소통 수단도, 정서 발달의 도구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단발성 시험을 보듯 영어와 멀어지게 할 뿐이다. 우리는 아이처럼 평등한 호기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국어와 영어가 동일 선상에서 논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영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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