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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말 비빔밥(이건범)

‘키스 앤 라이드(Kiss & Ride)’와 두더지 잡기

by 한글문화연대 2021. 12. 27.

처음 듣거나 보고 이 말의 뜻을 알아챌 사람은 아무도 없다. “키스 앤 라이드”라고 내가 한글로 적었지만 실제로는 로마자로 “Kiss & Ride” 또는 줄여서 “K & R”이라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는 유흥주점 이름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기차역 근처 찻길 바닥에 이걸 크게 적고 작은 간판도 세워두었지만, 도무지 뜻을 알 수 있는 다른 정보는 없다. 역 주변에 만들어둔 이 공간은 기차 타러 온 사람을 배웅하거나 기차 타고 오는 사람을 마중하러 차를 몰고 왔을 때 잠깐 차를 세워둘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이 말을 처음 접했던 때는 2017년 여름이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사는 한글문화연대 회원 한 분이 신분당선 동천역 앞에 이런 표시가 있는데 도무지 무엇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면서 우리에게 알린 것이다. 마침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안전용어 가운데 어려운 말을 찾아 알기 쉬운 말로 바꾸는 운동을 한창 벌이던 때라 이 제보가 매우 반가웠다. 공공정보에서 외국어를 남용하게 되면 외국어 능력 차이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이 있다. 특히 안전용어는 생명을 다루는 말이니 국민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국민에게서 제보받은 용어와 안전 관련 공문서에 담긴 용어 가운데 130여 개를 골라 정부 부처 여기저기에 이를 고쳐 달라는 운동을 펼치면서 그중 16개를 한글날 시민투표에 붙였다. 굿닥, BRT, 싱크홀 등과 함께 ‘Kiss & Ride’도 꼭 바꿔써야 할 어려운 안전용어 5위 안에 들어갔다.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용인시 도로정책과에 개선을 요청하였고, 2018년 봄에 이 표시는 ‘환승정차구역’으로 바뀌었다. 국립국어원에서 ‘환승정차구역’으로 대안어를 내놓았고, 용인시는 이를 따른 것이었다. 사실, 이 용어가 등장하는 국토교통부의 규칙에서는 ‘배웅정차장’이라는 말을 썼었고, 우리는 용인시에 ‘마중주차장’이라는 말을 제안하였지만, ‘마중’과 ‘배웅’이 차를 세워두는 두 가지 목적을 따로 표현하는지라 국립국어원에서는 그다음의 행동과 연결 지어 ‘환승’이라는 말로 두 목적을 다 아우른 것 같았다.

나는 국토부에서 ‘배웅정차장’이라는 말을 이미 제시하였음에도 스스로 ‘Kiss & Ride’를 시민들 보는 도로에 버젓이 표기한 까닭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게다가 ‘배웅’이라는 말은 “떠나가는 손님을 일정한 곳까지 따라 나가서 작별하여 보내는 일”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니 어찌 아깝지 않을쏜가.

어쨌거나 나는 이 표시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이 만족하였다. 어려운 용어 때문에 혹시라도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아,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글문화연대에서 이끄는 대학생 연합 동아리 ‘우리말가꿈이’ 가운데 2019년 봄에 활동을 시작한 어느 학생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에 떡하니 ‘Kiss & Ride’가 씌어 있었던 것이다. 사무실에 갇혀 살던 우리 직원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말가꿈이 대학생 신수호 님은 2019년부터 2020년까지 2년 동안 이 위험한 안전용어와 씨름하면서 개선 운동을 펼쳤다. 어떤 때는 그 혼자, 어떤 때는 우리말가꿈이 동료들과 함께, 어떤 때는 한글문화연대의 힘까지 합쳐서 새로 생기는 ‘Kiss & Ride’를 ‘환승정차구역’, ‘잠시정차구역’ 등의 우리말 표시로 바꾸어냈다.

 


그런데 이 일은 오락실의 두더지 잡기 같았다. 여기서 없애면 저기서 삐죽 솟아오르고, 거기를 없애면 또 이쪽에서 튀어나오고…. 게다가 여기서도 줄임말 남용 경향이 나타났다. 새로 지은 역에서는 ‘Kiss & Ride’가 아니라 ‘K&R’로 쓰기 시작하였으니, 이 정도면 암호 중에서도 암호다. 심지어는 세종대왕의 도시임을 자랑하던 여주시의 ‘세종대왕릉역’ 앞에도 이 ‘K & R’이 자리를 잡고 한글을 비웃는 일이 벌어졌다. 2020년 5월 15일 즈음하여 신수호 님은 비 오는 어느 날 세종대왕릉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원의 광교중앙역, 고양의 탄현역, 인천의 영종역, 경기 광주의 삼동역, 이천의 이천역 등 수도권에서 17곳을 바꾸어내도록 두더지는 계속 솟아올랐다. 만들 때는 철도시설공단과 한국철도공사가 주도하는 것 같은데, 일단 만들어지면 관리 주체가 지자체로 바뀌는 것인지 서로들 떠넘기는 전화 돌리기에 지치기도 여러 번. 2021년 들어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사태의 뿌리를 뽑기 위해 국가철도공단 이사장에게 개선 요청 건의서를 보냈으나, 국토교통부 법규를 바꾸지 않는 한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2021년 2월 초에 한글문화연대에서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의원에게 이 사안에 대한 감독과 개선 관리를 요청하였다. 2021년 3월 12일에 국회 교통위에서는 한국철도공사와 국가철도공단에서 강릉역 등 18곳의 표기를 바꾸었고, 앞으로는 우리말로 시설을 하겠다는 답을 받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이제 두더지 잡기는 끝난 것이다. 이게 나의 또 다른 착각이 아니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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