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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말 비빔밥(이건범)

‘Safe Korea’, 이제는 우리말로 약속한다.

by 한글문화연대 2021. 12. 27.

아마도 많은 사람이 소방서 벽면에 크게 적어 놓은 이 문구를 본 적이 있으리라. “119의 약속 Safe Korea”, 이 약속은 2006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소방방재청(현 소방청)은 국민제안 공모를 통해 최종 선정된 브랜드 ‘119의 약속 Safe Korea’라는 구호를 소방본부와 일선 소방서 등의 소방기관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구호는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국민 공모전에서 국가 홍보 구호로 뽑힌 ‘다이나믹 코리아’와 많이 닮았다.

이 시기는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질서가 우리나라에도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가던 때였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와 문화의 빗장이 풀리면서 ‘강자의 언어’인 영어는 모든 분야의 ‘필수’로 자리를 잡았다. 외환위기 직후의 영어 선호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동아줄 잡기였다면 2002월드컵을 거치면서 영어 선호는 자신감에 바탕을 둔 공세적 성취 표상으로 바뀌어 갔다. 이런 사회 분위기 탓이었는지 영어 사용에서는 여야의 차이도 별로 없었다.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4년에 시내버스 체계를 바꾸면서 B, G, R, Y 로마자를 대문짝만하게 버스에 인쇄했고, 2007년부터 노무현 정부에서는 전국의 2,200여 개 동사무소 이름을 ‘주민센터’로 바꾸어갔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는 영어몰입교육 도입을 검토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뒤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영어 사용에 거리낌이 없어진 것 같다. 세이프 코리아 구호는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였다.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이 구호를 고치자고 두어 차례 소방청에 공문을 보냈었고, 2017년에 “안전용어는 쉬운 말로!” 사업을 하면서도 문제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외국어 남용 사례에 대처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뛰어다니는 동안 이 구호의 개선에 제대로 힘을 쏟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2019년 어느 국민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분은 공무원 출신인데, 관공서의 영어 남용을 한탄하시면서 그 대표 사례로 “119의 약속 Safe Korea”를 들었다.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2021년 3월에 이분한테서 다시 편지가 왔다. 또 ‘세이프 코리아’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는 답장을 쓰면서 한글문화연대가 반드시 이 구호를 없애기 위해 나서겠노라고 약속했다. 2021년 4월 9일, 우리는 실태 파악을 위해 소방청에 이 구호를 사용하는지 문의하였는데, 뜻밖에도 이미 구호를 바꾸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2019년 3월 15일 2기 소방청 출범 당시 벌인 ‘소방청 브랜드 슬로건 공모’에서 “국민 중심의 안전가치에 일상의 안심을 더합니다.”라는 우리말 구호를 뽑아 “119의 약속 Safe Korea” 대신 사용하고 있으며, 2020년에 전국 소방서에 우리말 구호로 바꿔쓰라고 공문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인터넷 지도의 거리보기로 살펴보니 전국 많은 소방서에서 ‘Safe Korea’ 대신 우리말 구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 바뀐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에 얼룩처럼 세이프 코리아 구호가 남아 있었다. 한글문화연대에서는 4월 30일 서울시 종로소방서를 시작으로 9월까지 서울, 경기, 강원, 충청 등 ‘Safe Korea’를 사용하고 있는 전국 47곳의 소방서에 우리말 구호로 바꿔 달라고 공문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 협조를 부탁하였다. 확실히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뒤처리가 만만치 않은 법이다.

그래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47곳 중 36곳에서 호응해 주었다. ‘하나되는 국민소방, 함께하는 국민안전’(의왕, 구리, 성북 등 소방서 6곳), ‘국민중심의 안전가치에 일상의 안심을 더합니다.’(밀양, 평창소방서), ‘ㄱㄱㄷ경기도 소방’(하남소방서), ‘119의 약속! 안전한국!’(동해소방서), ‘부산을 안전하게 119’(부산북부소방서) 등 17곳의 소방서가 쉬운 우리말 구호로 바꾸었다. 9곳은 우리말로 변경할 예정이며, 10곳은 ‘Safe Korea’를 벽에서 삭제했다고 답을 보내왔다.

소방서는 전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지라 일일이 실태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지도의 거리보기로 확인하다 보면 ‘Safe Korea’ 구호가 없던 곳에서 새로 내거는 일도 일어난다. 서울에도 아직 27곳의 소방서와 소방대에 이 영문 구호가 남아 있다. 이제 대학생 연합 동아리인 우리말가꿈이 학생들이 575돌 한글날을 맞아 이 구호를 바꾸기 위해 나선다. 국민이 알아듣는 약속,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약속을 할 때 소방청과 소방대원들의 눈물겨운 헌신은 더욱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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