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코로나19는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비대면의 시대를 열었다. 서로가 혹시나 보균자이진 않을까 조심하며 접촉을 최소화하는 일상이 계속되며 많은 기업과 관공서에서는 ‘무인화’ 열풍이 불었다. 코로나19 이후 1년이 지나 비대면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인 2021년 3월, 많은 언론에서 앞다투어 누리소통망에 올라온 사연을 소개했던 적이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을 간략히 옮긴 것이다.
“엄마가 햄버거 먹고 싶어서 집 앞 가게에 가서 주문하려는데 키오스크를 잘 못 다뤄서 20분동안 헤매다 그냥 집에 돌아왔다고, 화난다고 전화했다. 말하시다가 엄마가 울었다. 엄마 이제 끝났다고 울었다.”
이 글은 1만 4천회 넘게 공유될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고, 이런 현상에 대해 ‘디지털 소외’ 또는 ‘디지털 불평등’이라는 단어가 관심받기 시작했다. 사회 계층간 디지털 기술 능력에 차이가 있어 서비스 이용과 정보 획득에 불평등이 발생하는 현상을 뜻하는 이 단어는 ‘정보’를 가지지 못한 사람을 지칭한다. 많은 언론에서 이런 문제를 꼬집으며 논란이 계속되었고, 정부에서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디지털 기술 능력’만이 이런 현상을 만들어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단순하게 모든 세대가 알아듣기 힘든 불필요한 외국어 남용이 문제가 아닐까 싶어 다양한 무인 단말기를 살펴봤다.
처음 소개했던 사연이 떠올라 햄버거 가게의 무인 단말기를 먼저 조사했다. ‘테이블 서비스’, ‘셀프 서비스’ 등 불필요한 외국어가 보였다. 어느 가맹점을 막론하고 대부분 햄버거는 메뉴 이름이 외국어로 되어 있는 점을 생각하면 주문을 시작할 때부터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주문이 끝나갈 때쯤이 되어서도 이런 외국어가 나온다면 막연함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지난해 경기연구원에서 발표한 <비대면 시대의 그림자, 디지털 소외>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과반수의 고령 소비자가 영문으로 표기된 메뉴명이나 ‘버거, 세트, 디저트’ 등 익숙하지 않은 메뉴 분류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커피 전문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첫 화면부터 ‘COFFEE’, ‘TEA’, ‘ADE’, ‘Delete all’, ‘ICE’, ‘HOT’ 등 로마자 천국이었다. 코로나19가 종식된다고 하더라도 더욱 늘어날 무인 단말기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상에 들어온 외국어와 로마자들을 몰아낼 필요성을 느꼈다.
다짐이 행동으로 바뀌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고서의 수치로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직접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우리말가꿈이’가 나섰다. 우리말가꿈이 21기 ‘파랑새’ 모둠은 50대 이상 어르신들에게 음식점, 관공서 등의 무인 단말기에서 자주 쓰이는 외국어를 보여주고 모르는 단어의 개수를 조사했다. 60대 이상은 제시된 단어의 절반 정도를 모른다고 응답했다. 현장 조사에 참여한 시민 한 분은 “무인 단말기 자체가 젊은 친구들을 위한 것 같다. 누구든 나이가 들수록 기계사용이 어렵다. 특히 초등교육만 받은 노인은 더욱 그렇다. 우리말로 표기하는 등 노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준다면 원없이 사용할 수 있다”며 배려 없는 외국어 사용을 적나라하게 꼬집어주기도 했다. 이런 현장조사와 더불어 온라인으로도 526명에게 설문조사를 했고, 불필요한 무인 단말기 화면 속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고 응답한 469명의 의견을 토대로 관공서와 기업 20여 곳에 공문을 보냈다.
공문을 보낸 뒤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조금은 실망감이 들 무렵, 현장 조사를 했던 우리말가꿈이에게 기업 한 곳의 무인 단말기가 바뀐 것 같다는 제보를 받았다. 확인해 본 결과 처음 조사할 때 외국어만 적혀있던 것과는 다르게 우리말을 앞세워 쓰고 괄호 안에 로마자를 썼다. ‘SOLD OUT’이라는 로마자만 적혀있던 외국어는 ‘품절’이라는 우리말로만 바꿔 쓰기도 했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에 기쁨도 잠시, 혹여나 우리가 제안해서가 아니라 자체 사업으로 진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해당 기업에서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좋은 제안을 해주어 고객들도 만족한다는 답변이 왔다.
무인 단말기와 현금 입출금기(ATM) 모두 고객의 편의를 위해 생겨났다. 화면을 보고, 누르고, 주문(또는 입·출금)한다는 점에서 사용법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무인 단말기는 글씨 크기, 화면 구성 등을 차치하고서도 불필요하게 외국어를 쓰기 때문에 이용자들이 불편을 호소한다. ‘디지털 소외’를 울부짖으며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해결책보다 하루빨리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꿔 세대에 따른 정보의 차이가 없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 글은 한글학회 <한글 새소식> 59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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