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꽤 오랜 기간을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외할머니는 20대에 소녀 과부가 되셨다. 당시 진주 강씨 양반집에 시집 가셨으나 어머니와 이모를 본 뒤 외할아버지가 한창 청춘의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모도 어려서 죽어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결혼한 뒤 오랜 기간을 외할머니와 함께 사셨다.
내가 어렸을 적에 외할머니는 나를 무척 편애하셨다. 귀엽다고 내 엉덩이를 두드리기가 예사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살짝 뒤켠으로 데려가 동전 한 닢을 쥐어주시기도 하였다. 나를 끔찍이도 사랑한 반면 막내인 내 여동생은 무척 구박하셨다.
하루는 초등학교 저학년인 동생이 책상 앞에서 책을 읽는데, " … 달구지가 옵니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들은 할머니, 빗자루를 들고 동생을 때리려고 방으로 달려들었다. 달구지는 경상도 방언으로 다리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동생이 할머니더러 달구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책 읽은 거라고 항변하는 동생, 변호인 증언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의 나…
어머니 말에 의하면 동생을 가졌을 때 할머니가 염소를 고아주었는데, 그것을 다 빨아먹고도 사내애가 아닌 계집애가 태어나서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외할머니는 줄곧 우리 부엌일을 해 주셨는데, 연세 들면서 어머니와의 다툼이 잦아졌다. 일종의 부엌 주도권 쟁탈전이었다고 할까. 그런 다툼은 외할머니가 절에 너무나 열심히 다니시면서 더 심해졌다.
내가 30대 초반 무렵, 서울 청담동의 작은 아파트에서 나, 부모님과 같이 사시던 외할머니는 안국동 조계사까지 입석 버스를 갈아타면서 다니셨다. 할머니는 학교를 안 다녔지만 한글을 깨우치고 영특하셔서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문제는 몸이었다. 당시 할머니는 허리가 완전 90도로 꺾여 있었는데,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버스에 다가가면 고맙게도 운전수가 기다려주곤 하였다. 할머니를 기억하는 운전수도 생겨났다.
하지만 그런 위험한 행동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와의 갈등이 커졌다. 연세 드신 외할머니의 고집과 이를 보아내지 못하는 부모님. 어머니는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더 너그럽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 결국 노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설사를 많이 하다 기가 쇠진하여 숨을 거두셨다. 그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모두 병원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집에서 많이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집에서 자다가 돌아가셨다. 아니 기력이 빠져 혼미한 상태에서 숨이 끊어졌다고 해야 옳겠다. 어쨌든 큰 고생은 안 하셨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10월의 어느 날 아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막 들어간 대학교로 출근하려고 하는데 아버지한테서 춘천의 숙소로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 돌아가셨다.” 웬일인지 제대로 된 우산이 없어 파란 비닐우산을 쓰고 나가 택시를 탔다. 은행에 들러 돈 20만원을 찾아들고 시외버스 정거장으로 간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여기저기 선 보면서 장가 들 신부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마지막 하신 말이 "영맹이 혼사 정했나?"였다고 한다.
할머니의 혼은 조계사에 모셨다. 이후 결혼하고 아내와 함께 조계사를 찾았다.
돌아가신 뒤 누워계시던 방에서 염을 하는데, 꺾였던 할머니의 허리가 꼿꼿이 펴져 있었다. 염꾼이 마지막으로 만져보라고 해서 만지는데,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그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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