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좋은 나라-16] 김영명 공동대표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또 한 해가 밝았다. 헌 해가 가고 새해가 왔다. 또 한 살을 더 먹었다. 늘 그랬듯이 별다른 감흥은 없다.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이 되던 세밑에는 기분이 좀 묘했다. 미국 유학 시절이었는데, 그래서 유학생 친구 집에 모여 술을 퍼 마셨다. 기분이 묘하지 않았더라도 술은 퍼 마셨겠지만…
그 뒤로는 새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별로 묘한 기분은 없다. 스물일곱이 되는 아들 녀석이 헌 해의 마지막 날에 기분이 좀 이상하다고 카톡을 보냈더군. 내 대답은 “다 그러니 일찍 들어오기나 해!”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통행금지가 없는 날이라 그 핑계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지금 내 아들은 훨씬 더 진하게 같은 짓을 한다. 통금은 만날 없는데도… 결혼해서 춘천에 살 때는 세밑에 서울 부모님 댁에 식구들 내려놓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밤 12시쯤 집에 갔다. 다음 날 차례 지내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요양원에 계시니 이제 그럴 일도 없다. 그저 새해가 온다고 흥분하는 텔레비전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보신각 종 치는 것까지는 봐 주고 잔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이런 저런 소원을 빌고 이것 저것 다짐도 한다. 나는 무슨 소원을 빌까? 나, 가족, 친지들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 그리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한 곳이 되기를 빈다. 그런데 이런 정도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일테니, 내게는 딱히 뭐라고 할 만한 소원이 없나 보다. 내가 새로 시작한 취미 활동이 잘 되기를 하나 추가한다. 그것이 나의 특별한 소원이라면 소원이겠다. 취미가 비슷한 사람과의 친애도 기대한다.
그럼 다짐은 어떤 걸 할까? 올해는 담배를 끊겠다, 인터넷 게임을 덜 하겠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 술을 덜 마시겠다. 사람들은 이런 다짐들을 한다. 내게는 다 해당되지 않는다. 명색이 교수이니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것은 해당될지 모르나, 내 전공인 정치학 공부는 더 이상 별로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타고난 기질이 있으니 책을 놓지는 않지만…
담배는 이십대 때 조금 피우다 체질에 맞지 않아 그만 두었고, 술은 덜 마시겠다고 수없이 다짐하기도 했지만, 그건 과음한 다음 날 얘기지 딱히 새해의 다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다짐할 필요도 없어졌다. 나이가 드니 과음은 저절로 안 하게 되고 술 약속을 잡는 일도 없어졌다. 과음하던 젊은 날을 아쉬워해야 하나? 그러나 전혀 그렇지는 않다.
하나 특별히 다짐을 할 게 있다면 좀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 어릴 적의 나는 부끄러움을 무척 타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는데, 십대 중반 이후 조금씩 깡패 같은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요새도 낯을 가리는 편이고 아직도 남에게 이것저것 권하는 성격은 못 되지만, 사람들은 나더러 ‘나쁜 남자’ 스타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기도 하고, 인상파라고 하기도 하고, 어렵다고 하기도 한다.
학생이나 제자들의 “교수님은 그게 매력이에요!”라는 엉터리 말에 너무 오랫동안 속아왔던 것 같다. 그러면서 돌아서서 욕하지 않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겠지. 아직도 날 찾는 제자들이 있으니…
하지만 세월도 가고 나이도 먹어 가는데 그런 평을 계속 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새해에는 나쁜 남자를 버리고 좋은 남자로 거듭나야겠다. 그런데 나쁜 남자가 도대체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야말로 ‘나쁜 놈’은 아닐테고, 곰살맞고 부드럽고 자상하고 싹싹하고, 이런 것의 반대일까?
하긴, 나는 돌직구를 잘 날리는 편이다. 꼭 남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래야 속이 시원하기 때문이다. 에둘러 말하기는 내게 힘들다. 이런 것을 나이답게 좀 고쳐볼까? 동창들 야구 하는데 원래 잘 하던 녀석들이 어깨 고장 나고 무릎 고장 나고 하여 잘 못한다. 그래서 내가 투수를 한다. 아니, ‘했다’라고 해야겠다. 이제 야구하는 일도 점점 없어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투수를 잘 하기 위하여 레슨도 받았다. 슬라이드와 커브 던지는 방법도 배웠는데, 잘 되지는 않고 역시 직구가 쉽기는 쉽다. 그래도 투수를 잘 하려면 역시 변화구도 잘 던져야 한다.
이젠 직구만 날리지 않고 슬라이드, 커브도 좀 써야겠다. 새해엔 부드러운 남자가 되어 볼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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